제17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교육감상)
첫 시작
대구공업고등학교 2학년 최재완
1960년 2월 28일 민주당 정·부통령후보 유세일인 일요일 등교에 부당함을 느낀 ‘나’는 일요일 등교와 반 독제정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지기위해 1960년 2월 27일 민영이와 민수, 영우 총 8명의 학생을 우리 집에 불렀다.
8명의 학생이 모인 다음 적막한 분위기 속에 영우가 먼저 말을 꺼낸다.
“일요일 등교하는 게 뭐꼬 참나 3월 2일 날 개학인데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친다 하지 않나 영화를 본다고 하지 않나 의도가 훤~히 보이는데 누가 당할 줄 아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
“나 참 아니, 우리 고등학교는 등교 사유가 뭔지 아나? 토끼사냥이란다 나참 어이없어서 무슨 학생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 도 아니고 뭐꼬!”
허탈하다는 듯이 민수가 말했다.
“여당인 자유당 후보 유세에선 더 많은 인원을 참가하기 위해서 학생들 단축수업과 직장인들 조기 퇴근을 시키더니 야당 후보 유세일 땐 일요일에 등교시키는 꼬락서니들 하고는 국민이 무슨 정치 도구 인줄 아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영우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속고만 살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지 지금처럼 반 독재 정권이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큰일 한번 치러보자.”
‘나’가 말했다.
“그래 너 말이 맞다. 이렇게 속고만 살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생각한 것이라도 있나?”
민영이가 말했다.
“우리가 결의문을 작성하여 우리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도청 광장에 모여 함께 시위하는 것이 어떻겠냐?”
‘나’가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우리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국민 속이면서 대통령 할 텐데.”
결의에 찬 듯이 민수 가 말했다. 민수가 말하자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한다.
‘나’는 7명의 학생의 결의에 찬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래 해야지 우리라도 해야지 이 반독재 정권의 부당함을 국민에게 알리고 우리나라에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위해서라도’라고 생각하며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우린 결의문을 작성과 시위 시간을 정한 다음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밤잠을 설치며 내일이 오길 기다렸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나’와 7명의 학생과 함께 시청 광장 조회단에 올라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결의문을 읽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나’가 결의에 찬 큰 목소리로 읽었다. 그 결의문을 읽는 동안 시위 소식을 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어느새 시청에 꽉 차 있었다. 결의문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나의 귀를 가득 메웠다.
그리곤 도청에 모인 시민 800명들은 자유당 도당 당사 앞을 지나쳐, 도지사 관사 앞으로 행진하였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던 중 경찰들이 시위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여 2·28시위는 7시 40분경 경찰들에 의해 강제 해산이 되었다.
물론 이 시위에 최고 주동자인 ‘나’를 포함한 총 120명의 학생들도 경찰에 체포당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석방이 되었다. 경찰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석방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강제 체포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 이미지 손상 때문에 석방 하였나? 아니면 시민들의 반발이 더 심해져 시위가 번질게 될까봐 걱정되어서 석방하였나?’ 등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나’의 학교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학교에서 하교를 할 때마다 누군가가 미행을 하거나 매일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이라는 이유로 감시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시위로 인해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약 120명이 경찰에 체포당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시작한 2·28 학생민주운동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운동이었고 비록 크게 열린 시위는 아니었지만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게 되는 4·19혁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이후에 민주화 운동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