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장상)
어느 일요일(단편 소설)
대구공업고등학교 전자기계과 2학년 이정희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날, 나는 포근한 이불 속에서 따사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늦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소리치는 알람시계가 나를 깨우고 찌뿌둥한 몸으로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본 순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앗뿔싸!” 오늘은 2·28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가하기로 한 날이었다. 달콤한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대가는 그야 말로 최악이었다. 늘어진 몸뚱아리를 이끌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서 두류공원 2·28기념탑으로 향한다. 머릿속에서는 초조함이 가득했지만 앙상한 나뭇가지가 일렬로 늘어선 길을 따라 택시가 분주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뒷좌석에 기대어 편안함이 밀려오자 아직 깨어나지 못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리곤 ‘이 시간에 잠을 더 잘 수 있었어’라고 나에게 속삭인다. 온 몸에 세포들이 힘들다며 아우성쳐댔다. 봉사시간을 얻기 위한 나의 욕심이 애써 가기 싫은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2·28이 뭐 대단하다고 기념식까지 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의 주말 아침잠을 망친 2·28이 미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출발한 나를 체념한 채 뿌연 창문 밖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뭉게구름 사이로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두류공원을 통해 2·28에 한 걸음 다가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택시가 공원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나는 걸어서 가야만 했다.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었고 아직 떠나가지 못한 낙엽들이 가을의 흔적을 되새김질한다. 촉촉한 흙길에서 미처 마르지 못한 겨울비가 향기를 솔솔 뿌린다. 기념탑에 다가갈수록 엄숙한 공기가 나를 짓누르며 한 걸음 무거워졌고 공원에는 수많은 어르신들이 참여하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저 멀리 친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한 아름에 달려갔다.
“야 내 자리는?”
“몰라? 쌤한테 물어보셈.”
“쌤 어디 있음?”
“네 뒤에”
얼핏 봐서는 누구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아리따운 선생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다니, 잠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쌤, 저는 어디에 앉을까요?”
“이제 왔어? 자리 없나?”
“네 없는데요.”
“일단 출석체크하고 있어봐.”
가장 늦게 도착했기에 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어르신들과 함께 앉아야만 했다. 나 홀로 지루하게 보내야만 하는 시간을 생각하니 끔찍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는데 어르신들은 저마다 정장을 차려입거나 나름 깔끔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정치인이나 교육감들도 얼핏 보였는데 긴 장문의 연설을 읽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군복을 입으신 몇 안 되는 분들도 눈에 띄었지만 유달리 밝은 흰 정장을 입은 노인이 스쳐지나갔다. 순백의 노인은 밝은 웃음으로 모두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의 웃음 덕택인지 모두가 인사를 반갑게 맞아들었다. ‘높으신 분인가’라는 생각이 맴돌며 어디서 본적이 있는가 하고 기억을 되짚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노인이 자리에 앉을 무렵 식이 시작되었다. 형식적이고 따분한 식, 나의 불안감은 틀리지 않고 길고 지루한 연설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2·28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어떤 뜨거움도 느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진, 무언가를 열망하는 그들의 눈빛들을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에게 2·28은 그저 평화로운 일요일이었다. 식이 끝나고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나가자 공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새우마냥 웅크린 채 빠져나가던 찰나, 누군가 나의 팔을 치면서 지갑을 떨어트렸다. 이리저리 누군가의 발에 치이는 지갑은 자꾸만 나에게서 도망갔다. 수풀을 지나듯 사람들을 밀어내며 지갑에 근접했을 때 나는 있는 힘껏 달렸기에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이쿠’ 하는 신음소리와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갑의 상태를 확인하고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있다가 문득 아까 어렴풋이 들려오던 신음소리가 생각났다. ‘방금 누군가를 밀었던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흰 크림에 초콜릿 발리듯 그의 옷이 진흙으로 물들었다. 아까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던 노인이었다. ‘큰일났다.’ 텅 빈 머릿속에 이 한마디만이 꿈틀거렸다. 나는 어서 한 손을 뻗어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마르지 않은 진흙에 흙투성이가 된 노인의 옷, 그리고 흩어진 그의 물건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려 하강하는 독수리처럼 잽싸게 흩어진 물건들을 집어 올렸다.
“괘.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어찌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에게 그는 또 다시 온화한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그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건넸다. 그는 물건들을 받아들고는 그 중에서 오래된 손목시계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아니 안 괜찮네! 자네는 이 옷을 보고도 괜찮아 보이는가?”
“저-어. 죄송합니다.”
몇 번의 사과를 위해 나는 끊임없이 기역자가 되어야만 했다.
“농담일세. 그렇지만 실수를 했으니 내 옷을 빨아다주겠나?”
옷들은 세탁소에 맡기면 될 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 정도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바람직한 청년이군, 그럼 나의 집에 함께 가세. 여기서 벗어줄 순 없지 않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어미오리를 따라가는 오리새끼마냥 노인의 뒤꽁무니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약간은 으슥한 골목길, 허름한 주택들이 줄맞춰 서있는 길 끝에 할아버지의 집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른 집들보다 한결 뒤죽박죽 엉켜진 모양의 집은 마치 보물 상자가 있을 것만 같은 보물섬을 연상시켰다.
“뒤돌아보게”
“네?”
“뒤돌아보라니까. 남의 집 비밀번호를 엿볼 생각이었나?”
“아, 죄송합니다.”
‘이런 건물에 도어락이라니’ 환상이 단숨에 으스러졌다.
“들어오게나.”
현관에서부터 익숙한 향기가 풍겨왔는데 마치 나의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하나같이 오래된 가구들로부터 흘러오는 진한 세월의 향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있어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뭘 그리 멍하게 보고만 있나. 와서 앉게.”
노인 때문에 진을 다 빼서 그런지 나는 색 바랜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씻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게나. 출출하면 과자를 꺼내먹어도 좋네. 다만 흘리지 말아주게나. 나도 늙어서 자네처럼 힘이 넘치지 않으니 청소하는 것도 일이지 말이야.”
그는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오래된 물건들 속에 홀로 외로이 남겨졌다. 외로움을 달래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식탁 위에는 조금 전에 떨어트린 물건들과 소중히 어루만지던 시계가 있었다. 시계를 집어 들여다보았지만 오래된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욕실 왼쪽 편에 허름한 문을 여니 노인이 자주 사용하는 듯한 삐딱한 나무 책상이 있었고 큰 책장이 나를 가로막았다. 책장 속에는 수 만권의 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겉이 거뭇한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조심스레 책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내고선 아무 것을 집어 그대로 펼쳤다. 1960년 4월 26일 맑음 ‘드디어 이승만 독재정권이 물러났다!’ 일기장인 것 같았다. 일기장이라기보다 군데군데 대화문도 섞여있어 마치 기록문 같았다. 김이 빠진 나는 도로 책장에 넣으려 했으나 56년 전 오늘의 날씨는 어땠는지 궁금하여 오늘 날짜를 펼쳤다. 1960년 2월 28일 ‘우리의 꿈을 펼치는 날이다’ 날씨가 적혀 있지 않고 이상한 말만 적혀있어 싱겁기만 했다. 아쉬운 대로 전날 날씨라도 보자는 마음에서 한 장을 뒤로 넘겼다. 1960년 2월 27일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소 격한 감정이 실린 제목에 온화한 노인이 무엇 때문에 56년 전 저렇게 분노했을까 궁금하였다. 강렬한 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율에 읽어야만 한다는 뜨거운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다. 찬바람이 구멍 사이를 후벼 팠지만 양 옆으로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동지들이 있어 전혀 춥지 않았다. 봄은 분명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터인데 오늘따라 휘몰아치는 바람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웬일인지 선도부학생들이 교문에 서있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을 쑤셔 기침이 났고 동지의 빡빡한 머리를 보고 전우애를 느꼈다. 이상하게도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았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으니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1교시가 지나고 2교시가 지나고 3교시가 지나서야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꽤나 무거운 표정이셨다.
“반장 인사”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3교시를 놀았던 터라 꽤나 우렁찬 목소리가 교실 곳곳에 울려 퍼졌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허나 우리는 단합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토끼사냥을 나서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내일 등교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아~~~!”
탄식하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자자 조용.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내리신 중요한 행사인 만큼 모두들 빠지지 말고 등교하도록 빠지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상. 반장은 내일 오자마자 인원 점검하도록”
“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단호한 말씀과 더불어 일요일 등교라니 누구라도 듣자마자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요동치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도시락을 깠다. 밥에 김치뿐이었지만 배고플 때 먹는 밥은 진수성찬 부럽지 않았다. 더군다나 10년간 동고동락을 함께한 강수, 민주, 정범이 있어 더 할 나위 없이 풍족했다.
“야 너거들 내일 올 끼가?”
“캄 닌 안 올 끼가? 오라면 와야지”
“사내 자슥이 패기가 없네. 안 그러냐. 정범아”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전마나 니나 또~옥 같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만이 넘쳐났지만 민주의 얼굴은 굳혀져 있었다.
“야 민주, 인마 표정이 와그라노, 뭔 일 있나? 초상치랐나 얼굴 좀 피라”
민주는 밥풀 한 올까지 남김없이 싹싹 긁고 목을 축인 다음에서야 입을 열었다.
“너거들 내일 와 학교 오라는지 아나?”
“선생이 토끼 사냥한다 안 카디나. 이 새끼 선생 하는 소리를 뭐로 들었노.”
“닌 그게 참말이라고 믿나. 너거 내일 장면 박사 대구 내리오는 거 알제. 유세하러”
“그래 그건 나도 들었다. 근데 그기 우리랑 무슨 상관이노. 정치야 어른들이 하는 거 아이가”
“척보면 척 아이가. 내일 그거 들으러가는 사람이 한 둘이가. 거기에 우리까지 낑가 있어봐라. 사람 몰릴 거 뻔하제”
“그래서 그기 어쨌단 말인데”
“아직도 모르겠나. 윗대가리 새끼들이 우리 유세장 가지 말라고 학교오라는 거 아이가. 우리가 연설 들으러 가면 사람 몰릴까봐”
“아.”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새까만 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냥 단합력 기르는구나 했는데. 어찌 느낌이 쎄하단 말이지. 장면 박사 오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토끼 사냥 한다 카이…….”
“캄 니 말은 윗대가리들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거가”
“그래 맞다 정치적 도구로써.”
“뭐? 도구? 새끼들이 우리를 물건으로 보네”
모두들 분노에 휩싸여 쉽사리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평소 우리 사이에서 장난기 많기로 소문난 민주이지만 오늘은 강인하고 엄숙해 보였다.
“우짜노 이제”
“어쩌긴 뭘 어째 낼 유세장 뛰가야지.”
“우리끼리만 가면 뭐하노. 눈 껌뻑 안 할 낀데”
나는 그 때 ‘뭉쳐야 산다’라는 말이 왜 떠올랐을까
“캄 뭐 다 델꼬 가자고?”
“정범, 민주 둘이 다니면서 소문 다 내뿌라”
“뭐 어찌할라 그 카노”
“내일 1시 장면 유세장으로 간다.”
“니 지금 진지하나?”
“새끼들아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 한 적 있나. 내는 절대 저거들 원하는 대로 못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권리는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소문을 내도 못 듣는 애들도 있을 거 아이가. 내가 내일 선배한테 부탁해서 연설문 가져 올터이 네가 조회대에서 읽어뿌라.”
“그래. 좋다 해보자”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평소 우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우리는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가냘픈 초승달이 시커먼 어둠속에 가는 달빛을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달빛은 곳곳에 반사되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마치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10대의 어린 소년이었을 그가 무엇에 이토록 결의에 찼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그를 조금씩 존경하게 되었다. 아직 세차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호기심은 극에 달했고 한 장을 넘겨 계속 읽어 내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꿀 같은 늦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한껏 비장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하였다. 등굣길에 나의 든든한 동지들을 만나 백만 대군이 두렵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선도부들이 서있는 길을 지나갔지만 오늘따라 괜스레 겁이 났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교실은 이유 없는 부당한 일요등교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갈 듯 했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선생들도 이를 눈치 채고 학도들을 달랬으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이었다. 어느새 정범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야, 내가 다른 학교한테도 말해 놨다. 가들도 다 알고 있더라. 1시 유세장으로 향한다고 전했으니 우리만 잘 출발하면 된다.”
나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나는 이 많은 동지들을 이끌고 실패했을 때의 불안감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다. 실패를 할지언정 우리는 시작점이 되리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고맙다. 잘해보자.”
나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수백 명의 까만 동지들이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였다. 나는 당당히 조회대로 나아갔다. 선생들이 나를 저지했지만 나의 동지들이 길을 터주었다. 마침내 조회대 단상에 선 나는 진중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중략)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는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여, 학도이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골의 시(詩)를 잊지 않고 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큰 함성이 메아리치고 그들은 교문을 박차고 얼룩진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묵중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고 과묵한 발소리에 세상이 흔들렸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불의의 권력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힘차게 거리를 나아갔다. 얼룩진 거리를 순백으로 채우고 스스로 빛이 되어 밝게 만들었다. 반월당을 거쳐 유세장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도들을 만나 더욱 더 힘차게 행진했고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때에는 모두가 기뻐하였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모두가 소리쳤다. 바른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학도들의 눈빛을,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걸음을 모두가 보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밝게 빛난 나머지 그림자가 일찍 드리워졌다. 경찰들은 우리를 ‘공산당’이라고 칭하며 진압하였다. 학도들과 경찰, 시민들이 뒤섞여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었다. 학도들이 아픔에 겨워 울부짖는 소리가 나를 아프게 했다. 어둠이 우리를 덮쳤으나 불꽃은 더욱 더 활활 타올랐다. 우리의 꿈은 오늘부터가 시작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라도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다. 숨막히는 하루이었기에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 그립다.

그 날짜 일기에 사진이 끼워져 있었는데 오래된 손목시계를 통해 손쉽게 노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학생들의 순수함,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강인한 눈빛이 사진을 뚫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마치 죄를 지은 것마냥 고개를 수그리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이 물밀 듯 밀려왔다. 또한 내가 그토록 지루하게 보내던 일요일이 이렇게 힘든 역경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괜스레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것들이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잠시 숨을 죽이고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를 느꼈다. 그들의 결의가 나무와 햇살에 담겨있고 나에게 스며들었다. 이제야 그들이 뜨겁게 열망하던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작고 미미한 것들조차 아끼고 보살피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아끼고 보살피기 위해 뭉쳐서 큰 나무가 되어 지켜야만 했던 아픔이 고스란히 가슴에 전해진다.
노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나는 그의 상체를 보았다. 곳곳에 상처투성인 그의 몸에서 어둠이 덮치고 지났던 길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대들이 맞서왔던 시간들을 왜 잊고만 살았던가. 왜 그들을 고통받게 두어야만 했는가.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노인을 안았다. 노인은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노인의 상처들은 다시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은 이제 존경이 되었다. 노인 앞에서 이제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다. 더 이상 여린 싹들이 아파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노인의 품에 안겨 온 몸으로 이 순간을 누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도 평화로운 일요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