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대구광역시장상)
아이야, 나는 최선을 다했단다
성화중학교 2학년 박소영
아직 봄이 채 오지 않아 칼칼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2월 28일 어느 오후, 멍하니 병실 한 쪽의 달력만 바라보던 노인이 쇠약해진 손을 들어 침대 가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집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몇 번이고 채널을 바꾼 끝에 어느 흑백 사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고서야 만족하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짧은 다리를 대롱대롱거리며 침대 옆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그에게 쫄래쫄래 다가왔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재미없는걸 봐요?“
허허, 오래간만에 호탕한 웃음을 보인 노인이 아직 통통하고 부드러운 어린 손녀의 손을 잡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큐멘터리 속 흑백 필름들이 노인의 머릿속에서는 붉디 붉은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화르륵 번져나갔다. 어두웠지만 강렬했던 기억들, 지금은 흑백으로만 전해져 오는 그 모든 것들은 노인에게만큼은 아직 생생한 시간이었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까아만 교복의 까까머리 학생들이 경북고에서 뛰쳐나왔다. 긴장과 비장함이 동시에 담긴 눈으로 무거운 입꼬리를 애써 들어올리며 각자의 주먹을 꽉 쥐는 학생들이었다.
“야, 우리 좀 이따 철장에서 만나자.”, “철장은 무슨, 꼭 나중에 천당에서 만나자.”
어딘가 진심인듯한 농담을 던지며 대구상고와 사대부고를 만나러 가는 길, 그 까아만 행진의 맨 앞에 ‘이대우’라는 명찰이 햇살에 반짝 빛났다.
어색한 적막 속에서 그들은 사대부고, 그리고 대구상고와 만났다. 비록 처음 본 사이였지만 까만 교복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해와 애정의 눈빛이 오갔다. 곧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 어쩌면 모진 고문과 문책을 당할 수도, 또 어쩌면 다시 걸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이 길을 함께 가는 학생들. 이들을 한데 모은 것은 다름 아닌 이대우로 그의 뒤에는 이 위험하고도 가시투성이인 길을 함께 걸으려 하는 8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생생히 보이는 비장한 눈빛과 단단한 결의는 그를 더욱 벅차오르게 했으며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했다. 그의 옆에는 사대부고의 최용호가 든든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합류한 대구고와 수많은 학생들. 이제 1200명을 넘어가는 이 행렬은 2월의 쌀쌀함까지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금일 낮 12시 55분,. 대우는 당당히 조회단에 올라 이 결의서를 읽었다.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난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의 결의문을 반겼다. 조회단에서 내려온 그를 학우들이 툭툭 두들긴다. 남학생들답게 묵직했지만, 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함께하는 동지와의 우정이 담뿍 담긴 손길에 대우는 또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유는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고, 민주는 시행착오만 거듭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곧 찾아올 현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구석구석 아파오는 듯 했다. 아마 경찰이 곧 들이닥치겠지, 그리고 나와 내 동지들을 끌어내겠지. 더운 함성들로 뒤덮인 교복들의 목소리는, 이 모든 공포를 날려 보내려는 듯 크고도 간절했다.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걸었다. 시가로 같이 걸었다. 그리고 대우는 그 사이 수많은 시민들의 얼굴을 봤다. 미안함이 담긴 얼굴도, 기특하다는 표정도, 얼른 손만 한 번 잡아 주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도, 슬쩍 같이 민주주의를 바라는 구호를 읊어보는 아주머니도 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우려했던-아니 예상했던 현실도 같이 찾아왔다. 제복을 차려입은 경찰들은 학생들을 막무가내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살리자!’, ‘못살겠다 갈아보자!’, ‘자유를 달라!’.. 억센 손아귀에 잡히면서도 동지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몸에 생채기가 나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구호를 지켰다.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달려들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들을 숨겨주었고, 몇몇 용감한 남자들은 경찰을 가로막으며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우도 함께 소리 질렀다. ‘민주주의를 달라! 민주주의를 살리자!” 경찰이 달려들라치면 필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학생을 정치도구로 쓰지 말라!’.. 팔이 끌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대우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가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학생들 몇 명, 그리고 그들은 끝까지 자유를 부르며 함께 소리질렀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달라!”
“니가 주동자야?” 험악하게 생긴 형사가 그를 발로 툭툭 찼다. “아니 어린 놈의 새끼가 왜 공부는 안하고 지랄이야..” 입술을 깨무니 피 맛이 났다. 여전히 형사는 대우의 옆구리를 발로 차고 있었다.
“공부 할만큼 했다는 놈도 지랄하는데 뭐가 어떻습니까.”
이 새끼가.. 억센 발길길이 다시 이어졌다.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그러나 후회는 되지 않았다. 철장 안에서의 몇 달이 지났다. 흘러흘러 전해들은 말로는 그들의 항쟁 소식을 듣고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고, 또 한 달이 지나 4월 19일에는 광주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했다. 늘상 발길질을 하고 욕을 하던 형사들도 언젠가부터는 풀이 꺾였는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다시 지났다. 언제나 굳게 닫혀있는 줄로만 알았던 창살이 반으로 갈라지며 대우는 다시 만난 동지들과 그새 까끌해진 얼굴을 마주 비볐다. 등 뒤에 내려꽂히는 형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대우는 경찰서를 나왔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 뿌듯함이 전신을 휘감쌌다.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울리는 듯 했다. 그렇게 그들은 1200명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어갔다, 당당하게, 자유롭게.
노인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텔레비전에는 아직도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노인이 손녀에게 손짓을 한다. 그러자 아직 솜털이 몽글몽글한 아이가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다.
“나는 노력했단다..”
나는 네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단다, 내 손은 힘든 세월을 거쳐오느라 거칠고 투박해졌지만 네 손은 그렇게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단다. 너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단다. 지금 네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리가 모진 시간을 견뎌왔단다.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말들을 속으로 삼킨 노인의 숨이 가빠졌다.
“아이야, 나는 최선을 다했단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병실 문이 닫혔다.
‘이대우’. 병실 문 앞에 쓰여진 환자의 이름이 형광등에 비췄다.
2월 28일, 이제 막 새싹이 솟아오르는 어느 날.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를 타고 민주주의의 함성이 병실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