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
2·28, 그 정신을 글에 새기며
강북고등학교 2학년 윤상배
93년 문민정부가 탄생하기 전까지의 우리나라는 30년 군사독재를 겪었다. 물론 그 전에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도 있었지 아니한가. 민주화는 아주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다. 꾸준한 시위를 통해 국민들은 독재에 저항했고,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을 통한 6·29민주화선언, 문민정부 수립이라는 큰 결실을 따내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시작은 어느 날 대구의 학생들이 벌인 민주화 요구 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른바 2·28민주화운동이었다.
2·28민주화운동, 대구의 또 다른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불리는 대표적인 저항운동, 또한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다. 대구에서 이러한 운동들이 일어났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많은 학생들이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주도했던 운동을 학생이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 55년, 우리는 민주화된 시대에서 그들은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혼란한 시기에 그런 학생들의 정신을 본받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 같이 뭉칠 수 있는 협력, 그리고 저항 정신,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 꼭 사람들이 갖춰야 할 것들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몇몇 고등학교 학생들이 받은 일요일 등교지시, 그 당시의 등교지시 내용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시험, 토끼몰이, 영화관람.’ 이런 것들 때문에 갑자기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이승만 정부. 그러한 정부의 명령에는 학생들을 경계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학생 한 명은 무섭지 않다. 그냥 ‘미친 놈’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최대 장점은 시너지 효과이다. 한 명, 한 명 모여서 폭발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 그 것이 정부로 향한다면 이승만 정부의 정권 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학생들은 지식인층에 속했다. 그들은 당시 거리의 소식통이었고, 그들의 지식은 가족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비록 조그마한 학생들이지만 가장 잠재력이 뛰어난 동시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그 당시 정부는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것뿐이었다. 잠시 동안 학생들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2·28민주화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4·19혁명에까지 이르렀고 이승만 정권은 결국 붕괴되었다.
작은 시작이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실의 한 예가 된 사건, 또한 우리가 배울 것도 가장 많다는 것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그 당시의 모순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과연 2·28민주화운동 전에 없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야당도 여당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당시 야당보다 더 의미 있는 운동을 학생들이 해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기록되었을 뿐이고.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엄청난 투쟁을 벌여 오랜 기간 끝에 얻어낸 것들이다. 우리의 윗세대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정치 체제를 바꾸기 위해, 윗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러한 일들을 이루는 데 걸린 시간만 약 반세기. 그 시작에는 우리 대구의 자랑스러운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도 실은 이 운동을 반대한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을 이러한 운동에 찬성했고 실천에 옮겼다. 왜?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이 사회의 부조리를 그리고 어른들의 모순된 행동들을. 우리 사회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 그들이 나선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하라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직접 행했다. 선례가 없는 상태에서도 그들은 시작했다. 탄압당하기 했지만 의미가 있었던 이유다. 순수했던 학생들이 사회를 바꿔보기 위해서 일어났다고. 당시 운동의 한 참가자였던 사람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우리 고등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것은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의 표출이었다.”
지금 시대에 우리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들이라면 과연 그러한 정신을 이어 받아서 행동 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정신을 받을 자격이 될까.’ 하고. 요즘 시대에는 개인주의가 널리 펴져있다. 그래서 우리 각각의 개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만나기를 불편해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또한 희생정신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라는 것이 희생정신이 아니다. 남과의 소통을 위해서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 접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희생정신이다. 나 자신에게도 묻고 싶다. ‘과연 학생들의 그 용기와 희생정신,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 중 가장 심오했던 것이었다.
나는 또 하나의 학생운동을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그때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나라 땅에서 일본인들이 지배하고 조선인들을 차별하는 그런 모순적인 사회에 저항했던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 그렇지만 생각만 했을 뿐, 나는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나 자신을 나약한 존재로 두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달랐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그들은 그들만의 신념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나아갔다. 그들이 인정을 받는 이유다.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 우리들만의 신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금 이러한 것들을 갖춘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것들을 갖지 못한 우리가 지금의 민주화된 시대를 누릴 자격이 있을까?
나와 같은 학생들은 그 당시의 학생들이 아니다. 그들에 비해 미성숙하고 개인주의에 길들여진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희생정신과 열정은 우리가 가장 배워야 할 것들 중 하나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러한 것들은 필요하다.
그 당시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지금의 민주화된 사회를 만드는 데의 시작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55년 전 학생들이 바랐던 미래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민주화를 위해 저항했던 그들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민주화된 사회라는 현실 이면에 가려진 그들의 노력, 이 사회의 밑받침이 되어준 학생들의 고귀한 정신을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