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
1960년 2월 28일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초상화-
경북공업고등학교 3학년 김민규
벌써 55년 전 일이다. 요즈음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의 기억만은 생생하다. 이승만이 불법선거를 통해 독재정치를 하며 학생들에게 일요일에도 학교를 나오라는 말을 했고, 토끼사냥이니 단체 영화 관람이니 하며 눈속임을 하는 것에 더욱 열이 난 학생들 사이에 덤덤히 조회 단의 계단을 밝고 조회단위로 올라가 버렸지. 그때 내가 조회단 위로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그 당시에는 몇 번이고 해봤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이 든다.
하여튼 조회단 위로 올라가 품속에서 퇴고를 여러 번 반복한 종이를 꺼내 들고 수많은 학생 앞에서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라고 읊조렸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학생은 나에게 박수를 쳐주었고 거리에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황급히 소식들 듣고 달려온 선생님들은 우리를 못 나가게끔 엄포를 놓았지만 이미 학생들의 마음을 굳게 고쳐먹었고 거리를 향해 모두가 한 걸음을 나아갔다. 우리 학교의 800명이 함께 시작한 시위는 반월당을 거쳐 도청을 지날 때는 그 수가 더욱 많아졌고, 유세장으로 가기 전 우리는 장면 박사를 만났고, 장면 박사를 향해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기쁨도 얼마 되지 않아서 도지사가 우리를 찾아 왔고 우리에게 “놈들 전부 공산당”이라 말했지만 이에 시민들을 개의치 않은 듯 우리에게 박수갈채를 쳐주었고, 더욱 힘이 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지만 우리의 시위는 경찰이 행하는 구타를 버티기엔 너무나 여린 학생들이었고, 경찰이 나타났을 땐 시위대는 아수라장이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때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침착하게 우리 학생들을 이끌었다면 어땠냐고 그때의 나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고 그저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고 강압적으로 끌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잔뜩 겁을 먹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를 향해 쫓아오는 경찰에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뜀박질을 시작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경찰을 따돌리고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서 주저앉아 소리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왜 난 울고 있었을 것일까, 경찰들이 무서워서? 친구들을 버린 내가 한심해서? 내가 생각하기엔 둘 다였었다.
결국, 눈물범벅인 채로 집으로 향했고 다음 날 월요일에 학교로 가보니 경찰에게 잡혀갔던 몇 명의 친구들은 다행히도 무사히 학교로 나왔지만, 끝에 잡혀간 한 녀석만 오지 않았다. 그 순박한 친구의 얼굴이 55년이 지난 지금 완벽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친구의 고귀한 희생이 남긴 내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행복한 나라가 되었지. 2월 28일의 그 숨 가쁘고도 힘찬 외침이 오늘을 만들었어. 친구야? 기억나니? 너의 희생을 너의 아픔을 우리는 기억하마. 잊지 않으마.

평소 2·28대구학생의거에 대한 관심이 적다 보니 글을 쓰기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관한 정보를 찾다 보니 이 민주운동은 독재정치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만약 내가 이때 있었다면 시위대에 동참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학생의 입장으로 당시 일어났을 법한 일을 각색하여 글로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품 활동을 통해 그때 당시의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고서도 후손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힘쓰신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발언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억제하지 않은 채 살아 갈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다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