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대상
민주주의의 도시, 대구
경일여자고등학교 2학년 3반 김소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와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최초’ 라는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수많은 이해관계와 편견 속에서 처음을 이루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에 국가가 발생하고, 그 국가에 민주주의를 도입해 그것을 뿌리 내리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눈물, 희생이 있었다.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는 없고, 대구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가르쳐준 운동 ‘2.28 민주운동’이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시초임을 밝힌다.
대구는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07년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국채를 상환하기 위해 대구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연, 금주, 절미를 실천하여 평화적인 국권회복을 시도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 이다. 이후 ‘신간회’의 항일 투쟁활동과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 또한 활발한 도시였다. 또한 대구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의 민족시인 이상화를 낳았으며, 1950년 6.25 동란 중에도 낙동강 방어 작전의 마지막 민주주의 도시였다.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 정책을 폈으며, 일본에 대한 강경 자세를 유지하고,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 격퇴에는 성공하였으나 전쟁 후 국민의 경제적 안정과 민주적 정치의 미흡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정권 교체를 했어야 하지만, 기득권의 자유당은 그것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고, 온갖 편법과 횡포, 불법을 자행하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단체도 이승만의 독재에 나서지 못하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다. 이에 자유당은 야당 후보의 연설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일요 등교를 지시하였으나, 대구의 남녀 고등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지금의 중앙로를 거쳐, 도청과 시청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이것이 2.28 민주 운동이다. 아무도 맞서지 못한 독재에 대구의 어린 학생들은 아무런 정치적 목적 없이 맞서게 되었다. 진정한 민주 저항 운동인 것이다. 독재의 억압을 받던 언론도 마침내 2.28 대구 학생의거를 보도하였고, 이는 전국으로 퍼져 ‘4.19 혁명’ 을 이끌어내었다.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도시 대구, 대구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한다.
대구에는 많은 명소가 있지만, 2.28민주운동과 관련하여 2.28 기념탑, 기념공원, 대구고등학교 옹벽이 있다. 2.28 기념탑은 1961년 4월 10일 지금의 명덕네거리에 애국 시민과 학생들의 성금으로 세워졌으나 지금은 두류공원으로 옮겨져 새로이 단장하였다. 남녀학생을 의미하는 두 개의 탑신과 순결을 의미하는 백색 화강석, 우리나라 지도를 나타나는 흑색 탑의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의 한 쪽 다리가 대구를 디디고 있음은 대구가 혁명의 발상지임을 상징한다.
2.28 기념공원은 중구 공평동에 위치해 있으며, 민주화를 선구한 대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리고, 시민 모두에게 그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2003년에 조성한 공원이다.
대구고등학교의 옹벽은 2.28 발상지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송악을 심어 푸른 숲을 조성하였고, 벽면의 타일은 228명의 글을 새겨 시공하였다. 매월 28일 2시 28분 음악회가 열리고, 인근의 보행등 역시 2.28m로 만들었다. 대구 시민에게 2.28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는 민주주의는 이토록 힘든 과정을 겪고, 탄생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와 권리에 대해 감사할 것이며, 일상이 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많은 사람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바탕이 된 도시 대구, 이런 대구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햇볕 따사로운 날 2.28 기념명소로 나들이 해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