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
“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기까지 ”
신명여중 1-5 곽인영
행복하시나요,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만족 하시나요, 지금 살아가는 이 자체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가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을까요. 벌써 몇 년이나 흘렀을까요. 독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운동. 그 당시의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얼마나 원했을까요. 그 때 우리나라의 초기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치. 과연 좋았을까요. 사람들이 원한 것이 바로 그런 정치였을까요. 이승만의 독재적인 정치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엄청난 빈곤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독재를 받기 전만 계속 회상하고 떠올렸을 겁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요.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은 끝내 실정이 절정을 이루게 되어 버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러한 사회에서 살기 힘들었습니다. 한 번 갈아보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생각. 그 생각들이 결국 그렇게 민주적 저항운동이 시작된 첫 딛음이었습니다. 그러할 때와 동시에 자유당 정부는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했습니다. 또한 정부통령 선거를 맞아 부패와 불의로 민심이 이반했음을 알고도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이건 공정치 못한 것이 아닐까요.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하는 게 말이 되는 걸까요. 그게 우리 사회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에 따라 온갖 악행을 하고나서 언론과 야당의 탄압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만 갔습니다. 심지어 여당 후보의 정치집회 때는 대중을 강제 동원하면서 야당 후보의 연설회 때는 청중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이게 정말 올바른 행동일까요. 사람들을 국민들을 생각하고 실행한 거였을까요. 투표장과 개표장에서는 사전투표, 대리투표, 피아노표 등 부정투개표로 민의를 조작하여 발표된 선거 내역. 이 선거를 비롯해 또 다시 대통령을 하게 된 이승만. 양심은 찔렸을지 모릅니다. 만약 정말 이승만이 부정투개표를 하지 않고도 당선 되었다면 정말 나라가 살기 좋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두 차례 연속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이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 도움을 주었다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승만은 정반대였고 이 같은 자유당의 행실에 결국 국민들은 화날 만큼 화났고,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나라가 계속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 역사로 한 번 비유를 하자면 한 나라의 백성이 왕이 정치를 못하는데 어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왕이 어질고 생각이 깊다고 하더라도 독재정치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 같은 부정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을 내리려고 하는 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엔 자유당 정권의 악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소리 없는 여론이 전국을 메아리쳤고, 대통령 선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에게 초점이 모였으나 불행하게도 조병옥이 서거하는 바람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이 모든 여망을 걸머졌습니다. 그렇게 일요일인 그 날의 수성천변 유세는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자유당 정권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는 이성을 잃고, 고교생인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 시재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를 대며 학생들에게 일요 등교를 강행했습니다.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날. 학생 중 누가 학교에 가고 싶었을까요. 분명 가고 싶었을 학생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당 정부의 행동은 결국 학생들도 마치 정치도구 마냥 희생시키려는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럼 학교에 따라 일요등교의 목적이 과연 똑같았을까요. 학생들을 일요일 날 등교시키려고 할 때 학교마다 각각 다른 핑계를 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과연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간계를 몰랐을까요. 그저 속아 넘어갔을까요. 아니요. 솔직히 학생들도 바보는 아니죠. 어느 학교는 이렇고 어느 학교는 이렇다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정권의 간계를 간파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어버리고 그 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를 어기고 이 같은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뀌어 궐기하면서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당국의 지시를 어겨가며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을 수 있었을까요. 세상 어느 누가 학교의 지시를 불구하고 뛰쳐나왔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배짱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현재 이런 정치였다면 과연 저렇게 행동 했었을 까요. 어느 누가 먼저 저렇게 행동했을까요.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 통을 거쳐 경북도청,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지사관사를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상황이었을 때 그랬을까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정말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그렇게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 추궁을 받았습니다. 이게 올바른 행실일까요. 그저 계급의 우선적인 계급사회의 모습일 뿐. 자유당은 아무 죄를 지지 않았는 둥 시선을 회피하였습니다. 언벌을 계획했던 정부 당국은 국민들의 분노에 처벌을 완화했고 독재에 움츠렸던 언론도 마침내 2.28 학생의거를 보도함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이 잇따라 궐기하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야당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고 어른들도 미처 말 못했던 공포 분위기를 학생들이 처음으로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시위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학생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사회는 어떨까요. 지금 정치는 어땠을까요. 독일의 히틀러보다는 더 독재적인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당당히 꿋꿋하게 나선 학생들의 시위. 학생들도 어른들이 말 못하는 사정을 알았던 만큼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당 정권에 육탄으로 항거했던 것입니다. 만약 지금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 때의 그 학생들이었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음을 앞두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그런 행실을 했을까요. 누구도 먼저 하지 못했던 것을 건국 이후 관제 데모만 보아왔고 관제 데모에만 동원 되어왔던 학생들이 처음으로 자발적이고 민주주의 의사 표시를 한 것은 우리의 사회를 180도 회전 한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런 시대에서 태어나 대구 시민의 자존심을 걸고 목숨까지 바치며 그 사건을 말렸으면 정말 난 대단한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더라도 고달픈 벌을 받게 되더라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이켜 보지 않고, 자신이 계속 어린애와 같게 행동하는 것처럼 그렇게만 커간다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을 법합니다. 한 때 어렸다면 그 다음에는 어른이 되기 위한 청소년이란 시기를 거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정신연령이 계속 어린애처럼 투정만 부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로 이끌어가기 위한 자세는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건.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건. 대구 시민의 자발적인 시위로 인해 점차 그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나라는 이렇게 발전 할 수 있었던 건 다 2.28민주운동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 시위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독재적인 정치에서 독재정권에 지배당해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독재정권에서 벗어나게 되기 위해서 때로는 도발적이며 때로는 위협적으로 살아갔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로워 진 것은 대구 시민의 용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작은 용기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뜨려보면 작고 작은 생각이지만 그 작고 작은 생각들이 뭉쳐 하나의 용기로 도전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여기서 훨씬 더 발전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 사회가 커가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기까지. 우리는 그 가능성의 틀에서 나와야합니다. 아무리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도전하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더 큰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