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2·28민주운동 글짓기 공모 수상작-금상
그 시대의 첫 걸음
대구고등학교 2학년 10반 3번 김동영
요즘 문학을 공부한 학생들이라면 ‘파수꾼’이라는 희곡을 한 번씩 읽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희곡은 그 당시 사회에 만연해있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통치를 비판하는 희곡이었는데 2·28 학생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1960년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뒤 우리나라에 남은 것은 가난과 이산가족, 그리고 수많은 상이군인과 사상자들을 빼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외에도 더 심한 상처가 남았는데 바로 공포,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 날 것인지, 다시 일어나면 얼마나 또 우리를 괴롭힐 건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속 깊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1948년부터 집권을 해오기 시작해 한국전쟁동안 나라를 유지해온 이승만 정권에게 신뢰가 가기 시작하고 이승만은 그 신뢰를 이용해 전후에도 준전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재침입을 경계하고 언젠가는 북한을 공격하자는 승공, 멸공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은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단지 이승만 정권의 유지책으로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가는 독재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야당을 중심으로 계속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아직 민주주의는 죽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별로 영향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비판은 그냥 허허벌판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60년, 다시 대통령, 부통령 선거철이 돌아왔다. 이전의 부산 정치 파동이나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열운 이승만 정권은 다시 집권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밖에 없어서 당선은 따논 당상이었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부통령 후보에 올라온 이기붕을 정부는 당연히 당선시켜야 됐지만 야당의 부통령 후보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야당의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야당 부통령 선거 유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점점 심해져 급기야 2월 28일에 있을 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학생들의 주말 등교까지 결정했다. 이 결정에 놀란 학생들은 27일 날 밤, 대구고, 경북고, 사대부고 학생부가 주축이 되어 시위를 하기로 계획하고 그 다음날 바로 시위를 시작했다. 이 사건이 바로 2·28 학생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비록 한 나절로 끝이 났지만 그 당시 시민들에게는 아주 크나 큰 충격이었다. 이후 3월 15일에 심각한 부정선거가 일어나고 마산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까지 오고 이윽고 4월 19일, 유명한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호감은 극에 달하게 되고 4월 25일, 결국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2·28 학생 민주화 운동의 배경과 그 결과였다. 이승만 정권 몰락 직후 우리나라는 다시 민주주의를 찾아 돌아가는 듯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시 수많은 정권들이 집권하다가 사라지고 사회도 바뀌어 갔다. 다시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제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2·28의 정신과 4·19의 열기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부화뇌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 진리고 어느 것이 사학인지 사람들이 구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광우병 사태의 촛불시위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단 몇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우리 국민들이 반으로 나뉘어서 싸웠다. 생각도 없이 그냥 편을 나눠 서로 싸우는, 무의미한 싸움이었다. 2·28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들은 그 당시 대중에게 퍼져있던 생각을 깨고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함으로써 시민들을 각성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들도 다시 우리들의 의견을 확고히 가지고 각성을 해야지 끝없는 부화뇌동은 계속되는 분열만 일으킬 것이다.